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북아프리카 전역의 시작 ==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절정에 달아올라 영국의 패배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지리적 요충지인[*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에 있었다.] 이집트마저 독일군에 넘겨주게 될 상황에 처하자 무솔리니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결국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야 이 자식아 불명예 전역하고 싶어? 빨랑 공격 안해!?" 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닥달했고, 그제서야 깨갱한 그라치아니 원수가 투덜대며 이탈리아 왕국 육군을 움직여 이집트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리비아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의 규모는 25만 전후였고, 이집트 주둔 영국군은 3만 전후에 불과하여 장비의 질에서 영국이 우수했음에도 병력은 이탈리아군이 8배 이상 많았기에 영국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 [[파일:66a4311fba0b8c06191405aad6e361ad.jpg|width=100%]]{{{#000 북아프리카 전역 영국군 제8군}}} || 공세를 시작한다고 하긴 했는데, 준비기간중에 이탈리아 공군을 책임지던 [[이탈로 발보]][* 무솔리니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이 시점에선 독일과의 관계 문제를 두고 무솔리니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팀킬을 가장한 무솔리니의 암살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현대에는 단순한 아군 오사가 정설.] 공군 원수가 항공정찰 중에 [[팀킬]]당해 사망한데다 내부사정과 뻘짓으로 인해 폭격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폭격도 없었고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부대의 움직임도 없어 이탈리아 육군은 '진격'이라기보단 그냥 뭉그적거리며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포병 수송용 트럭이 부족해서 직접 화포를 끌거나 노새에 의존해서 수송하거나 병력수송용으로 가져온 트럭들은 숫자가 부족한 상태인데다가 사막의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엔진이 퍼지기 일쑤였고, 그나마 상태좋은 트럭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전승 기념비를 세워야 된다는 명목 하에 대리석이나 수송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정보원들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이러한 비상식적인 행보를 속속 보고받고 있었고, 영국군 지휘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일단은 이탈리아군을 최대한 끌어들여 병력이 길게 늘어진 시점에 공세를 펼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나름대로 열심히 공세를 펼치고 있는 이탈리아군에게 정면승부를 걸지 않고 멀리서 포격을 가하거나, 기동성이 뛰어난 부대를 투입하여 찌르고 빠지는 형태로 응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9월 16일 국경에서 약 130km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영국군은 이 지점을 최일선 교두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실해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군이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이는 무솔리니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보니 발생한 보급의 문제였고, 그라치아니 원수는 시디 바라니 지역에 [[참호]]를 파고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땅을 빼앗았다고 [[정신승리법|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측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이 무렵 영국 본토 사정은 매우 급박하여 영국 본토의 방공군이 거의 괴멸직전처럼 보였고, 독일은 런던 대공습을 가하여 영국의 패배가 목전까지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요컨데 기다리면 누워서도 떡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고 이탈리아군은 프랑스 침공 때처럼 그대로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한 셈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영국이 항복을 한다는 조건에서나 가능한 소리였고, 실제로 영국은 독일군의 공세를 버텼다. 게다가 실제로 영국이 패배 직전인 것도 아니었다는게 함정인 게 하디스트 데이가 8월 18일로 거의 한달 전이고 영국이 승기를 굳힌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가 9월 15일이었다. 이탈리아군이 진격을 멈춘 시점에서 영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전세는 오히려 영국 쪽으로 기울었던 셈. --무솔리니는 이래서 멍청이다-- 어쨌든 영국군 지휘관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의 행동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본토 사정이 어렵다 보니 제대로 된 군수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전쟁준비가 어려웠고, 어느 지점까지 이탈리아군을 끌어들이고 어느 시점에 반격할 것인기 고민하던 차에 딱 멈춰주었으니 귀중한 시간도 벌어주었고, 반격작전의 구상도 한층 쉬워진 셈이었다. 게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도 런던 폭격이 독일군의 자충수로 작용하게 되자 히틀러도 슬슬 영국 침공은 물 건너갔다고 판단하여 단념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탈리아가 기대하던 상황은 물 건너가게 되었고 영국 이집트 주둔군은 사정이 조금 나아진 영국 본토에서 배송된 전차나 병력, 무기 등을 지원받으면서 착착 반격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